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닌그라드 공방전 (문단 편집) ===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Tanya_Savicheva.jpg|width=100%]]}}} || || 타냐 사비체바의 사진 || 타냐 사비체바(본명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사비체바. Татьяна Николаевна Савичева, 1930.1.23~1944.7.1)는 레닌그라드에서 제빵사 니콜라이(1936년 사망)와 재봉사 마리야의 다섯 아이들[* 예브게냐(1909년 생. 애칭 제냐), 레오니드(1917년 생. 애칭 료카), 니나(1918년 생), 미하일(1921년 생. 애칭 미샤)과 타티야나.] 중 막내딸이자 [[가수]]가 꿈이었던 열한 살 소녀였다. 하지만 독일군의 포위가 시작되자 이 소녀는 평생 꿈을 이룰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독일군의 공습 이후 작은 언니 니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타냐에게 니나의 수첩을 주었고 타냐는 제냐의 죽음 이후 제냐가 죽은 날짜를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타냐는 그 전에도 두꺼운 공책에 일기를 쓰고 있었지만, 나무도 석탄도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땔감 대용으로 써버렸기 때문에 저 수첩이 유일하게 남은 일기장이 되었다. 당시 기술자 공부 중이던 니나는 해당 수첩에 밸브나 보일러 설비 등에 관한 정보를 적어두는 용도로 사용했다. 수첩은 반 정도 비어 있었는데, 비어 있는 부분은 마치 전화번호부 수첩처럼 가장자리에 색인 용으로 키릴 문자가 적혀 있었다. 타냐는 날짜 순서대로 일기를 적지 않고, 자신이 적는 첫 글자의 페이지에 내용을 기록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일기인 "Женя умерла 28 дек в 12.00 час утра 1941 г."는 "Ж"로 시작하므로, 수첩의 "Ж" 섹션에 기록되어 있다.] > Женя умерла 28 дек в 12.00 час утра 1941 г. > (제냐 언니가 1941년 12월 28일 아침 12시 30분에 죽었다.) > ----- > Бабушка умерла 25 янв. 3 ч. дня 1942 г. > (할머니가 1942년 1월 25일 낮 3시에 죽었다.) > ----- > Лёка умер 17 марта в 5 час утра в 1942 г. > (료카 오빠가 1942년 3월 17일 아침 5시에 죽었다.) > ----- > Дядя Вася умер в 13 апр 2 ч ночь 1942 г. > (바샤 삼촌이 1942년 4월 13일 밤 2시에 죽었다) > ----- > Дядя Лёша 10 мая в 4 ч дня 1942 г. > 료샤 삼촌이 1942년 5월 10일 낮 4시에 (죽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원문에는 "죽었다"(умер)가 빠져 있다. 타냐가 적던 중 빼먹은 것으로 추정.][* 앞의 문장과 마찬가지 글자인 "Д"로 시작하므로 바샤 삼촌이 죽었다는 내용은 수첩의 오른쪽에, 료샤 삼촌이 죽었다는 내용은 왼쪽에 적혀 있다.] > ----- > Мама в 13 мая в 7.30 час утра 1942 г. > 엄마가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에 (죽었다)[* 여기도 원문에 "죽었다"(умерла)가 빠져 있다.] 모친의 사망 이후 타냐는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문장이 짧아서 그런지 감정이 북받쳐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기서부터는 글자가 이전에 비해 좀 더 커진다. > Савичевы умерли > (사비체바네 사람들이 죽었다.) > ----- > '''Умерли все''' > '''모두 죽었다.''' > ----- > '''Осталась одна Таня''' > '''타냐 혼자 남았다'''[* 출처: 러시아어 위키피디아 번역] 이후 모친의 시체는 윗집에 살던 이웃인 니콜라옌코 부부가 치웠다[* 당시 사망자 시신들은 전부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치웠는데, 남편 아파나시 니콜라옌코가 근처 유치원에서 두 바퀴 달린 손수레를 빌려와 타냐 모친의 시체를 싣고 바실리예프스키 섬으로 가지고 갔다. 니콜라옌코 부부에게는 딸 베라가 있었고, 타냐와 베라는 전쟁 전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나 전쟁 이후 타냐의 모친이 죽기 전까지 둘은 만나지 못했다. 니콜라옌코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에도 타냐는 이미 너무 허약해진 상태라 바실리예프스키 섬까지 같이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타냐 사비체바는 1942년 8월에 139명의 아이들과 함께 소련군의 레닌그라드 시민 소개 작전을 통해 니즈니노브고로드의 크라스니 보르라는 마을로 옮겨졌지만,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악화된 상태에서 장결핵으로 투병하다가 전쟁 후반기인 1944년에 세상을 떠났다. 공습으로 사망한 줄 알았던 작은 언니 니나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역시 레닌그라드 밖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진 작은 오빠 미하일과 함께 레닌그라드가 해방된 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타냐의 일기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 일기를 세상에 알리며 활동했고 2013년 9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타냐의 일기를 알리고 더불어 레닌그라드 공방전 희생자 추모단체를 이끌며 활동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geocaching.com/8b69c4f8-192b-45b2-b9d2-4550042cb25c.jpg|width=100%]]}}} || 타냐의 일기는 곧 레닌그라드 공방전으로 희생된 시민들의 상징이 되었고, 타냐가 묻힌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샤트키 공동묘지, 생명의 길, 피스카료프 공동묘지와 사비체바 가족의 자택에는 타냐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만들어졌다.여러 모로 러시아판 [[안네의 일기]]이다. 타냐의 일기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당시 증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